이황


이황

출생 1501년 11월 25일 (음력)
조선 경상도 안동
사망 1570년 12월 8일
국적 조선
별명 자는 경호, 호는 퇴계
직업 학자, 문인, 정치인
종교 유교
부모 이식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는 경호(景浩), 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은 진성(眞城)·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목차

생애

이황은 1501년(조선 연산군 7년)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李堣)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중종 23)에 소과에 입격하고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인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자(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좌랑을 거쳐 1539년(중종 34)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내고 1545년(인종 1) 전한(典翰)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丹陽)·풍기(豊基)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1550년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校理)·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1555년(명종 10)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1555년에는 최초의 사액서원인 도산서원(陶山書院)[1]을 지어 학문과 사색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이(李珥)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畵工)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玩賞)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編著)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인심경석의(人心經釋疑)》 및 기대승(奇大升)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四端七情分理氣書)》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1568년(선조 1)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國恩)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그가 죽자 선조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文廟)에 모셨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이황의 사상

이이와 더불어 한국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理)와 기(氣)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心性)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崎門) 학파와 구마모토(熊本)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誠)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敬)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考證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타

대한민국의 1000권 지폐 앞면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관련 항목

  • 퇴계전서
  •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 성학십도(聖學十圖)
  • [[ehtkstla

주석

  1. 여기에서 최초라는 말의 뜻은 지어질 때부터 사액서원으로 지어졌다는 뜻이다.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은 소수서원이다.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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